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인명 피해 === [[파일:6.25전쟁사망자.jpg|width=100%]] ||<-5> '''한국군 및 유엔군 인명 피해''' || || '''구분''' || '''계''' || '''전사''' || '''부상''' || '''실종/포로''' || || 계 || 772,608 || 175,801 || 554,202 || 42,605 || || 한국군 || 621,479 || 137,899 || 450,742 || 32,838 || || 유엔군 || 151,129 || 37,902 || 103,460 || 9,767 || ||<-5> 출처: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damageStatistic.do|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 ||<-5> '''육·해·공군 전/사망·실종자·부상자 현황''' || || '''구분''' || '''계''' || '''육군''' || '''해군(해병 포함)''' || '''공군''' || || 계 || 613,136 || 579,492 || 9,011 || 138 || || 전/사망 || 137,899 || 135,858 || 1,903 || 138 || || 실종자 || 24,495 || - || - || - || || 부상자 || 450,742 || 443,634 || 7,108 || - || ||<-5> 출처: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damageStatistic.do|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 ||<-4> '''피난민 현황''' || || '''구분''' || '''1951. 3. 현재(가)''' || '''1951. 5. 현재(나)''' || '''1953. 4. 현재(다)''' || || 계 || 6,514,582 || 5,758,435 || 2,611,328 || || 서울 || 128,400 || - || 40,219 || || 경기 || 1,729,516 || 1,661,312 || 804,030 || || 충북 || 700,300 || 270,051 || 156,713 || || 충남 || 760,477 || 802,572 || 275,932 || || 전북 || 329,032 || 414,103 || 326,331 || || 전남 || 523,125 || 577,737 || 156,929 || || 경북 || 1,383,208 || 575,292 || 229,089 || || 경남 || 558,496 || 521,414 || 440,415 || || 강원 || 330,800 || 987,160 || 161,311 || || 제주 || 71,228 || 148,794 || 20,359 || ||<-5> 출처: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damageStatistic.do|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 ||<-7> '''인명 피해현황(1950. 6. 25 ~ 1953. 7. 27)''' || || '''구분''' || '''계''' || '''사망''' || '''학살''' || '''부상''' || '''납치''' || '''행방불명''' || || 총계 || 990,968 || 244,663 || 128,936 || 229,625 || 84,532 || 303,212 || || 서울 || 129,908 || 29,628 || 8,800 || 34,680 || 20,738 || 36,062 || || 경기 || 128,740 || 39,728 || 7,511 || 25,479 || 16,057 || 39,965 || || 충북 || 70,003 || 24,320 || 3,409 || 12,658 || 6,312 || 23,304 || || 충남 || 75,409 || 23,707 || 5,561 || 20,290 || 10,022 || 15,829 || || 전북 || 91,861 || 40,462 || 14,216 || 15,364 || 7,210 || 14,609 || || 전남 || 193,788 || 14,193 || 69,787 || 52,168 || 4,171 || 53,469 || || 경북 || 97,851 || 35,485 || 6,609 || 21,061 || 7,584 || 27,112 || || 경남 || 72,306 || 19,963 || 6,099 || 32,417 || 1,841 || 11,986 || || 강원 || 130,777 || 17,122 || 6,825 || 15,483 || 10,528 || 80,819 || || 제주 || 325 || 55 || 119 || 25 || 69 || 57 || ||<-7> 출처: [[https://theme.archives.go.kr/next/625/damageStatistic.do|국가기록원 <전쟁 속의 통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k20_09010397.jpg|width=100%]]}}}|| 전쟁 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을 합쳐서 약 300만명 가까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도 한국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다. 그 대부분이 1950년의 남은 6개월 동안 발생했다. 지역별 인명피해로는 [[서울특별시]]/[[경기도]] 지역(특히 북부지역)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엔 [[강원도]] 지역, 나머지는 비슷하다. 그 이후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사망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상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 이건 농담이 아니고, 간단하게 기본적인 통계에서 현재까지 통계로 집계된 모든 세계각국의 군병력과 남북한의 군병력 및 민간인 사상자를 합치면 정말로 600만에 근접한 통계가 나오며, 통계의 불확실성을 생각해보면 높으면 높았지 낮을 순 없다.]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합쳐 한반도의 인구는 3천만 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잡아도 10% 정도. 과장을 섞자면 간신히 북한군으로부터 막아낸 지역 [[경상북도]](지금의 대구 포함),[[경상남도]](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다만 인명 피해는 남한보다는 북한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남한의 경우 전쟁 초기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본 뒤에는 인명 피해의 대부분이 군병력으로 국한됐고 그나마도 고지쟁탈전 위주라 장기간 지속되면서 병사들의 피를 말리기는 하지만 사상자는 정작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인구도 많아서 전후 인구가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전쟁 전 남한의 인구는 2,050만 명인데 1955년에는 100만 명이 더 늘어났다. 반면 북한은 기존 사망자도 미 공군의 폭격 등으로 인해 남한에 비해 많았던데다 월남민이 워낙 많아서 실제 감소의 규모는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심각한 편이었다. 가뜩이나 인구가 남쪽의 절반도 안 돼서 사람이 부족한 마당에 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오히려 남쪽보다 더 크니 이는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큰 부담이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전쟁 중반부터 포로의 일괄송환과 휴전에 목을 맨 반면, 정작 침략당한 이승만은 오히려 강경하게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 된 것도 실상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하던 시기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1950년 10월~12월 사이에 3~4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데, 이를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설립하고 [[반미]]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 절대 아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자세한 설명은 [[신천·재령군 봉기]]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국군과 미군도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북한 및 남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와 공산당,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으로 인해 상당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한 학살사건들이 여럿 있으며,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전남 나주 경찰부대 학살사건 등이 유명하다. [[http://www.jinsil.go.kr/appdealing/app_statistics.asp?decision_cd=005001|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학살의 규모는 전국구로 벌어졌으며, 그 정도는 생각 이상으로 매우 잔인했다. 공산주의와 공산당, 전쟁 중에 악질적인 행위인 피난민을 이용하여 후방에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는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 궁지에 몰릴대로 몰리던 당시의 전황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또한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박남식의 회고록 '실낙원의 비극'에는, 장군들이 시찰을 오면 사단장이 근처 피난민촌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다음 처녀성 검사를 하고 성상납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